윤석열의 '통일 독트린', 다음 정부가 기억이나 할까
(황방열의 한반도 나침반)보수 언론도 "1회성 이벤트용" 혹평
입력 : 2024-08-22 16:03:27 수정 : 2024-08-22 16:03:27
2012년 7월 16일,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평화통일'이라고 쓰인 항아리에 금일봉을 기부한 후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명박정부가 통일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며 추진했던 '통일항아리' 사업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통일 후 초기 비용 추산액 55조 원을 미리미리 준비하자면서 2012년에 이명박 대통령이 1호 기부자로 한 달 월급을 전액 내놓으면서 각계 기부를 독려했습니다. 10년도 더 지난 현재 모인 돈은 9억원 정도에 불과합니다. 결국 통일항아리 기금 측은 최근 이 기금을 남북협력기금의 민간 기부금 계정에 적립하기로 했습니다.
 
MB정부 '통일항아리'-박근혜정부 '통일준비위' 어디로 갔나
 
임기 내내 남북관계에 갈등만 가득했던 정부였습니다. 그런데 임기 말에 갑자기 '도둑처럼 올'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면서 대규모 기금을 국민성금으로 모으자고 했으니, 그 결과는 이미 예상된 것이었습니다. 박근혜정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임기 초부터 북한에 강경했던 정부가 돌연 '통일대박'이라면서 민간까지 포함하는 대규모 통일준비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초반에는 '통일대박'이 '통일 대통령 박근혜'의 줄임말 아니냐며 설레발을 치기도 했으나 지속할 동력이 없었습니다. 통일 준비는커녕 개성공단은 박근혜정부에서 문을 닫지 않았습니까?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자유 평화 번영의 통일 대한민국' 비전을 발표했고, 이 정부의 외교·안보 분야 최대실세인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이를 '8·15 통일 독트린'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김 차장은 지난해 4월 한·미 정상회담의 '워싱턴 선언'을 '사실상 핵공유'라고 겉멋을 부렸다가 미국이 바로 부인하는 망신을 당한 바 있습니다. 국제정치에서 지금도 거론할 수밖에 없는 '먼로 독트린', '트루먼 독트린', '닉슨 독트린', '브레즈네프 독트린' 등은 차후 평가에서 '독트린'으로 인정받으면서 의미가 부여된 겁니다. 이 정부처럼 '폼' 잡으려고 스스로 먼저 갖다 붙인 게 아닙니다.
 
'통일 독트린'이라면서 화해·협력도 빼…그러니 부인해도 '흡수통일론' 비판
 
내용을 톺아보면, 외화내빈(外華內貧)의 전형입니다. 명색이 '통일 독트린'인데, 그 전제가 되는 '화해·협력'이 빠져있습니다. 또 "자유의 가치를 북녘으로 확장하고 북한의 실질적인 변화를 끌어내는 데 우리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북한 자유 인권 펀드>를 조성하여, 북한 주민의 자유와 인권을 촉진하는 민간 활동을 적극 지원…", "북한 주민들이 다양한 경로로 다양한 외부 정보를 접할 수 있도록, '정보접근권'을 확대하겠다" 등, 연설의 대상을 주로 북한 주민들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북한 정권을 제외하고 북한 주민과 직접 소통해야 한다는 것은, 한국 극우·보수 세력의 오래된 주장이지만, 전체주의 체제 특성상 북한 정권을 빼놓고는 어떤 대화도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공작'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흡수통일론'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는데, 윤 대통령은 이번에 "자유가 박탈된 동토의 왕국, 빈곤과 기아로 고통받는 북녘땅으로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확장되어야 한다"며 이를 더 분명하게 천명한 겁니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이번 발표가 대한민국 정부 차원의 공식통일방안인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북한 체제 인정'이라는 전제를 유지하느냐는 질문에는 답을 피하면서 "정부 입장은 흡수통일이 아니"라고만 합니다.
 
그러니 '당국 간 실무차원의 <대화협의체> 설치 제안'은 흡수통일론 물타기용 장식품에 불과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남·북한을 '적대적 두 국가'라고 규정하고 그 후속작업을 벌여온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최근에도 "한국 쓰레기들"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한 상황이니, 북한이 이에 응할 가능성은 '기대 난망'이고 정부인들 이를 모르겠습니까? '성사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김영호 장관은 "윤 대통령이 처음으로 제시했고, 모든 의제에 열려있다는 점도 분명히 했기 때문"이라는 무의미한 답변만 반복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을지 자유의 방패(UFS·을지프리덤실드) 연습 사흘째인 21일 오후 경기도 용인시 지상작전사령부를 방문해 전투작전본부 내 작전상황실에서 을지연습에 참가 중인 한미 장병들을 격려하며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게다가 최소한의 성의도 없습니다. 지난 15일 '대화를 제의하고 북한의 반응도 불분명한 상황'에서 윤 대통령은 19일에 "현재 우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무모하고 비이성적인 북한의 도발과 위협을 마주하고 있다"고 했고, 21일에는 "북한 정권은 언제든 도발을 감행할 수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비이성적인 집단"이라며 "적화통일을 꿈꾸며 호시탐탐 대한민국을 노리고 있는 북한 정권에게 '침략은 곧 정권의 종말'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시켜야 한다"고 수위를 높였습니다. 한·미 연합훈련 계기 발언이라 해도, 대화 제의 잉크는 말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 통일방안'에서 '독트린'으로 격하…민족공동체통일방안 유지한 건 다행
 
윤석열정부는 정권 출범 초기부터 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 "자유주의적 철학·비전이 누락됐다"며 새 통일방안을 만들겠다고 하다가 올해 들어 '새 통일담론'이라고 수위를 낮췄는데요, 그러다 결국 '독트린'이라고 표현하면서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보완한 것"라고 했습니다. 야심 차게 새 통일방안을 만들겠다고 했으나 집권세력 내부 반대가 컸고, 민주당 등 야당과는 아예 논의 시도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민주당 등도 긁어부스럼이 될 것을 우려해 발표 전까지는 아예 입에도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보수언론인 <중앙일보>는 "북한이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현실성 있는 담론을 제시해야 설득력을 가질 통일 독트린의 속성상 이번 발표엔 아쉬움도 적지 않다"고 했고, <동아일보>는 아예 "1회성 이벤트용 이상의 의미를 갖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혹평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면, 어느 당이 집권하든 다음 정부가 기억이나 하겠습니까?
 
윤석열정부의 ’자유 평화 번영의 통일 대한민국‘비전은 '자주·평화·민주' 3대 원칙과 '화해·협력→남북 연합→통일국가'라는 단계적 접근론이 핵심인 민족공동체통일방안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멉니다. (관련 기사: '윤석열정부 통일방안' 대 '대한민국 통일방안')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통일방안을 무너뜨리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입니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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