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 대북 라디오 지원"...이걸 공개하나? 그것도 통일부가?
(황방열의 한반도 나침반) 오히려 대북 정보유입 방해
입력 : 2024-09-12 16:10:27 수정 : 2024-09-12 16:10:27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달 15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9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며 '8.15 통일 독트린'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라디오는 최초의 방송 매체입니다. 작은 수신기 하나면 충분하기 때문에 접근도 쉽고, 정보 격차도 가장 적습니다. 그래서 소련과 동유럽 등 과거 사회주의권의 외부 정보 유통에도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었습니다. 미·소 냉전기 초기부터 미국 CIA가 동유럽을 겨냥해 배후에서 운영한 <자유유럽방송>(RFE)이 그 대표 사례입니다. 인터넷 시대가 된 지 이미 오래고, 인터넷이 뉴미디어의 총아로 등장한 지도 오래지만, 라디오의 위력은 여전히 강력합니다.
 
'대북 정보 접근권' 확대…‘8·15 통일 독트린'의  '7대 추진방안' 중 하나
 
윤석열정부가 북한 주민의 외부 정보 접근 확대를 위해 민간의 대북 라디오 방송 관련 지원을 확대한다는 계획입니다.. 북한주민의 '정보접근권 확대'는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광복절에 밝힌 '8·15 통일 독트린'의 '7대 통일 추진방안' 중 하나인데요, 이를 이어받아 통일부는 지난 달 29일 배포한 '8·15 통일 독트린' 해설자료에서 북한 주민의 정보접근권 확대를 위해 대북 라디오 방송의 콘텐츠 제작과 인력 양성 등 민간 활동을 지원하겠다고 밝힌 겁니다.
 
통일부는 이 자료에서 "북한 주민이 다양한 경로로 다양한 외부 정보를 접하게 하여 이들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고, 북한 미래세대에게 자유 통일의 꿈과 희망을 선사해야 한다"며 "통일 대한민국이 북한 주민들을 포용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면, 이들은 자유 통일의 강력한 우군이 될 것'이라고 그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8·15 통일 독트린' 발표 뒤 '노골적으로 흡수통일을 추구한다'는 비판이 잇따르자 정부는 역대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통일방안인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보완한 것이라며 손사래를 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명색이 '통일' 독트린인데 그 전제가 되는 '화해·협력'은 빼놨고, 이 독트린의 대상을 '북한 주민'으로만 설정하면서 '북한 당국'은 멀리 제쳐놨습니다. 남한 정부가 그 주민을 직접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북한이 개방된 사회라면, 분단 문제는 절반 이상 해결된 상황일 겁니다.
 
전체주의 북한 체제 특성상, 남한 정부가 북한 정부를 빼놓고 그 주민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공작'이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흰소리를 해도 '흡수통일 시도'라는 비판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민간 대북 라디오'지원인데, 이걸 공식 자료를 내서 공개까지 해 버렸습니다.
 
이전 정부들은 북한에 대한 외부정보 유입 활동을 하지 않았을까요? 문재인정부에서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대북전단-대남 오물풍선 갈등 국면에서 "소위 대북 정보유입은 (삐라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충분하게 되고 있다. 내용을 밝힐 수는 없지만 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박 의원의 '증언'이 아니더라도 이건 사실 상식의 영역입니다. 정권 성향에 따라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정보·공작 기관이 전통적으로 해온 기본업무입니다.
 
'대북 정보 유입' 공개 언급할수록 역효과 가능성 높아
 
그런데 이 정부는 이걸 '떠벌리고' 있습니다. 북한은 최근 반동사상문화배격법, 평양문화어보호법, 청년교양보장법 등을 만들고 이를 매우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남한 드라마를 본 10대 학생들을 수갑 채워 체포하고 그 부모들의 신상까지 공개했습니다. 외부 정보유입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 정부가 이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공식선언하고 나선 겁니다. 조용하게 하면 될 일인데, 오히려 정보 유입에 역효과를 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북한 당국에게 더욱 더 통제를 강화하지 않으면 안되는 '명분'을 만들어준 꼴입니다. 외부에서 '정보 접근권'을 공개적으로 언급할수록 북한 당국은 그 방어벽을 더 공고하게 구축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그 공개 주체가 통일부이고, 통일부가 공식 정책으로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아연실색할 노릇입니다. 이런 사안을 공개한다는 자체도 어처구니 없지만 최소한의 '굿캅-배드캅' 전술도 없습니다. 통일부가 윤석열정부에서 아무리 '북한정보부', '북한인권부'가 됐다고 해도, 아예 북한과의 대화·협상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인가요?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지난달 1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8·15 통일 독트린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통일부의 대화·협상 포기 선언?
 
용산 대통령실과 통일부도 남북 당국간 대화협의체 설치와 압록강변 수해 지원 제안을 북한이 무시할 것임을 확실하게 예측하고 있었을 겁니다. 아니 애초 응답하지 못하도록 상황을 만들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까요?
 
라디오는 정치적 상징성이 큽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과거 효과적인 수단이 라디오뿐인 시절에 미국 정부가 소련, 중국 등에 대한 라디오 방송을 지원했다"면서 "라디오 방송의 대상이 되는 국가들은 라디오를 심리전의 대표적인 무기로 인식하게 되면서 그에 격렬하게 반응해왔다”고 진단합니다. 북한이 남한에 맞서 '사이버 심리전'을 더 공격적으로 시도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입니다.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 육군 참모총장이 이끄는 칠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을 무너뜨린 날입니다. 이날 아침 칠레 국영 라디오는 산티아고가 화창한 날씨였음에도 계속 "오늘 산티아고에 배가 내린다"고 방송했습니다. 칠레 군부가 쿠데타 개시를 알리는 작전암호였습니다. 이 정부 외교·안보 분야를 장악한 뉴라이트 인사들이 혹여라도 북한에 대해 이런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요?
 
하도 욕을 먹는 정부이니 뭐라도 티를 내고 싶기는 하겠으나, 공개할 것과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을 구분도 못하니 딱할 노릇입니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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