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일 확대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저 자신은 당시 어려운 환경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대단히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하신 것에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이달 초 방한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1998년 한일 공동선언을 포함해 역사 인식은 역대 일본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음을 명확히 말씀드렸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총리로서 그의 방한은 이번이 마지막이었는데요. 그 때문에 일부에서는 기시다 총리가 한국민의 응어리를 풀어줄 만한 뭔가를 하지 않겠냐는 '희망 섞인 전망'도 했습니다만, 처음부터 무망한 기대였습니다.
2015년 8월 14일, 당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전후 70년 담화'를 발표하고 이로써 과거사 문제는 종지부를 찍겠다고 했습니다. 이 선언은 그 이후 일본 정부들에도 그대로 관철돼 왔습니다. 기시다 총리 본인은 아베의 '전후 70년 담화' 발표 당시 외교부 장관이기도 합니다.
윤 대통령-기시다 총리 12번이나 만났지만…
2022년 5월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2년 반이 채 못 되는 기간에 무려 12번이나 만난 사이에, 마지막 선물도 없었습니다. 고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노련한 정치인은 상대방이 절박해한다고 해서 합의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초조함을 이용해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을 끌어낼 가능성이 크다"고 했습니다. 기시다 총리에게 불만을 표해봤자, 아마추어의 푸념일 뿐입니다.
윤석열정부는 지난해 3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제3자 변제'로 한·일 관계 '정상화'를 시작했습니다. 일본 '전범기업들'이 아니라 한국 행정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이 조성한 자금으로 대법원 판결금을 대신 변제하겠다고 나선 겁니다. 한국이 먼저 대승적으로 나서면 일본 기업들이 따라올 것이라며 '물컵론'을 운운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달 현재 재단에 남은 돈은 6억원뿐입니다. 대법원에서 승소한 강제동원피해자 52명에게 당장 지급해야 할 금액이 120억원에 달해, 배상금 지급도 중단된 상태입니다. 1965년 한·일 협정에 따른 대일 청구권 자금을 받은 국내 기업 16곳 중, 지난해 윤정부가 '3자 변제'안을 내놓은 이후 현재까지 기부금을 낸 곳은 포스코뿐이고, 일본 기업들은 물컵을 채울 생각도 없습니다. 애초 예상 그대로입니다. '3자 변제' 발표 당시부터 예상한 상황입니다. 국내 기업들은 자칫 배임이나 제3자 뇌물죄 대상이 되기 십상이고,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 자체를 부인하는 상황에서 일본 기업들이 움직이기도 어렵습니다.
심규선 재단 이사장은 일본에게 "어렵다고만 하지 말고 언제, 어떤 형식이든 반드시 제3자(대위) 변제에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 측의 불만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피해자' 한국이 일본에 '구걸'을 해야하는 지경이 돼버린 겁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기시다 총리가 떠난 뒤인 지난 10일 국무회의에서, 이번 한·일 정상회담 결과를 언급하면서 "각 부처는 양국 간 협력 사업과 정부 간 대화체 운영을 차질 없이 추진해서 우리 국민들이 한·일 관계 개선의 효과를 몸소 체감토록 힘쓰길 바란다"고 지시했습니다.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회원들이 지난 5월 23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열린 '일제 강제동원 문제, 일본기업 배상촉구 대법원 규탄 기자회견'에서 규탄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일본 언론들, '한·일 관계 개선' 지속가능성에 우려 표출
윤 대통령의 이런 자부심과 달리, 일본 언론은 '한·일 관계 개선' 지속가능성에 회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이니치신문>은 지난 7일, 강제동원 배상금 부족 상황을 설명하면서 "재단은 배상금 상당액을 법원에 공탁하려고 하지만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아 새로운 법적 다툼으로 발전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윤석열정권의 지지율이 30% 밑으로 떨어졌다"고 전한 뒤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이 정권을 차지한다면 대일 정책은 크게 변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해결되지 않은 한·일 간 현안이 표면화 돼 관계악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지지통신>도 기시다 총리가 개선 흐름이 정착된 한·일 관계를 차기 총리에게 인계하려 하지만, 과거에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해 한·일 관계가 악화했던 전례 등이 있어 미래는 불투명하다고 지적했고, <교도통신> 역시 "양국 간에는 여전히 복잡한 역사 문제가 불씨로 남아 있어 관계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지 단언하기 어렵다"고 덧붙였습니다. 일본 언론도 윤석열정부의 대일외교가 한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음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는 '친한파'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총리에서 물러난 이후이기는 하지만 2015년 8월에,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추모비에 무릎을 꿇고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해 사죄하기도 했는데요. 2022년 5월 9일 윤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을 때 윤 대통령으로부터 "한·일 관계의 선생님이 돼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 "일본은 바뀌지 않고 있다"
그는 올해 1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1965년 한·일) 기본조약으로 (한·일 과거사 문제가) 해결됐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개인 청구권은 현 국제법상 당연히 인정돼야 하는 흐름으로 인식되고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대화와 타협조차 없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에는 "사실 일본이 답해야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침묵했잖아요. 일본의 책임인 거죠"라며 "일본은 바뀌지 않고 있는 것이거든요"라고 답합니다. 그러면서 "일본인은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위에서 내려다보듯이 우월 의식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에는 종속돼 있고 반대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서는 그렇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거죠"라는 말도 했습니다.
우경화 흐름이 뚜렷한 일본 정치판에서 이런 말을 하는 하토야마 전 총리는 당연히 소수파이고 정치적 영향력도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객관적일 수 있습니다. 윤 대통령은 이런 '선생님'에게 무엇을 배운 것일까요? 온통 거꾸로만 가고 있습니다. 이러면 '때리는 일본(기시다)'보다 '말리는 윤 대통령'이 더 미워지지 않겠습니까?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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