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임유진 기자] 반도체 시장 업황을 두고 한파(침체기)를 예고하는 목소리와 기우라는 상반된 의견이 동시에 제기되고 있습니다. 시장에선 반도체 시장 선행 지표로 통하는 D램 현물 가격이 소폭 하락세를 보이면서 업황이 고점을 찍고 다운사이클(침체기)에 진입하는 것 아니냐는 부정적 시각이 고개를 들고 있는데요. 여기에 인공지능(AI)회의론이 커지면서 빅테크의 수익성 부족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반면 해당 현상들은 일시적인 하락세로, 정체기가 장기화할 가능성은 작다는 의견이 엇갈립니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시장 다운사이클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고 있습니다. 신호탄을 쏜 건 외국계 투자은행 모건스탠리가 추석 연휴 기간인 지난 15일 발간한 보고서였습니다. 보고서는 스마트폰 및 PC 수요 감소에 따른 일반 D램 가격 하락, 고대역폭 메모리(HBM) 공급 과잉을 이유로 제시하면서 반도체 시황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삼성전자, 12나노급 16Gb DDR5 D램.(사진=삼성전자 제공)
특히 모바일과 PC 등 전방 수요 부진으로 D램 업황이 4분기 고점을 찍고, 2026년까지 공급과잉일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습니다. AI 핵심 반도체인 HBM 역시 중국 업체 등의 진입으로 공급 과잉을 초래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앞서 모건스탠리는 지난 2021년 8월 '반도체, 겨울이 온다'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반도체 업황 다운사이클을 정확히 예측해 주목받은 바 있습니다.
모건스탠리는 지난달에도 보고서를 통해 "AI를 둘러싼 흥분 속에서 반도체와 테크 하드웨어의 경기 순환적(시클리컬) 특성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면서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았습니다.
보고서 외에도 미국 경기 둔화 가능성과 AI 거품론이 사그라지지 않는 점이 반도체 다운사이클을 우려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입니다. 챗GPT 이후 빠르게 성장해온 AI 산업의 수익성 문제가 대두되는 데다, 미국의 빅테크 업종의 2분기 실적 부진이 이어지는 점이 AI 거품론을 부채질 하고 있습니다.
약 1년 동안 상승세를 보이던 메모리 D램 가격이 주춤하며 소폭 하락세로 돌아선 것도 반도체 다운사이클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올초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PC용 D램 레거시(범용) 제품(DDR4 8Gb 1Gx8)의 지난 8월 평균 고정거래가격은 전월보다 2.38% 내린 2.05달러로 집계됐습니다. 지난해 10월 이후 줄곧 상승 흐름을 보여온 이 제품의 가격이 하락한 것은 올해 들어 처음입니다.
통상 D램 현물가격은 반도체 시장 선행 지표로 여겨집니다. 당장의 가격 등락에 따라 추세를 단언키 어렵지만 시장 매매 심리를 반영하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D램 가격 하락 배경에 대해 "PC 제조업체들이 2분기에 공격적으로 재고 확보에 나서면서 재고 압박이 가중됐다"며 "전반적인 수요 침체와 맞물려 판매 실적이 부진해 PC D램 조달이 줄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8월 하순에 D램 공급사들이 낮은 계약 가격에 칩을 제공하기 시작하면서 작년 4분기 시작된 가격 상승세가 뒤집혔고, 월간 거래량도 상당히 감소했다"고 부연했습니다.
SK하이닉스 1c DDR5 D램.(사진=SK하이닉스 제공)
하지만 빅테크 기업들이 AI의 투자를 꾸준히 늘린다는 점에서 다운사이클 진입은 기우라는 반론도 나옵니다. HBM 등 고부가 제품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실적 상승이 이어지면서 업사이클(호황기) 추세가 유효할 것이란 관측입니다.
김영건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수요처의 부품 재고 비축이 일단락되며 단기 가격 정체기가 온 것으로 판단한다"며 "세트 수요의 급격한 부진이 동반되지 않는 한 정체기가 장기화할 가능성은 작다"고 내다봤습니다.
김 연구원은 "보수적 설비투자 기조 지속으로 공급량 증대도 제한적"이라며 "가격 추세는 반락이 아니라 일정 수준의 톤다운이며, 올해 4분기에 반등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김광진 한화투자증권 연구원도 "반도체 산업이 다운사이클로 진입하고 있다고 판단할 근거가 부족하다"며 "일부 레거시 제품에서 확인되는 소폭 가격 하락은 우려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전망했습니다.
그는 "빅테크들의 AI 투자 의지는 확고하고, 업계 생산능력(캐파)과 공정 전환 속도를 고려할 때 내년에 D램 공급이 많이 증가할 개연성은 부족하다"며 "수요와 공급 단에서 중대한 변동이 없는 한 내년 상반기까지는 급격한 가격 하락이 확인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진단했습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전방 수요가 침체됐다고 하지만, 자동차 등 여타 사업군에선 아직도 반도체를 많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해당 산업의 파이가 줄어들지 않는 한 지난해처럼 반도체 혹한기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다른 관계자는 "스마트폰과 PC 등의 판매 부진 탓에 하반기 D램 수요가 줄어들 것으로 보이지만, HBM과 같은 고성능 D램 수요는 급증하는 만큼 D램 양극화 현상 과정에서 보이는 일시적 현상"이라며 "다만 지난 2년여에 걸쳐 반도체 혹한기를 겪은 시장으로서는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임유진 기자 limyang83@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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